비가 내리는 밤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빗소리를 배경 삼아, 방 한구석에 쌓여 있던 지난 2년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여행 가이드라는 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치열하게 살아낸 흔적들. 그 빛바랜 페이지 속에 대단한 깨달음이나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한 장씩 넘겨본 기록들은 지독할 정도로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비슷한 고민, 비슷한 후회, 비슷한 다짐, 그리고 되풀이되는 실수들.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 낯선 도시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건만, 어쩌면 나는 내면의 거대한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미련 없이 버렸다. 끈을 묶어 빗속의 수거함으로 던져버렸다. 과거로 돌아간들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또다시 같은 욕망에 흔들리고, 같은 선택을 거쳐 결국 같은 후회 앞에 서 있을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다이어리를 비우고 돌아오는 길, 빗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종이 위에 적힌 고민의 궤적은 제자리걸음이었을지 몰라도, 그 기록을 통과해 온 '나'라는 사람은 결코 그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매일 길 위에서 타인의 욕망과 외로움, 찰나의 쾌락을 목격하고 그 수많은 인간 군상을 품어내며, 나는 모르는 사이에 단단해져 있었다. 내 삶을 '별거 없다'고 덤덤히 인정할 수 있는 여유와 내공은 바로 그 여행길 위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이제 과거를 억지로 고치려 하거나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가불해 쓰지 않기로 했다. 내 손에 남은 것은 거창한 진리가 아니라, 그저 오늘 하루다. 오늘 내가 안내해야 할 길을 걷고, 내 앞의 여행자를 소중히 대하고, 밤에 편히 잠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생은 거창한 내일을 준비하는 여정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작은 간이역을 묵묵히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2년의 다이어리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미 끝난 시간에 대한 집착과,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린 것이다.
가이드북을 덮은 나는, 비로소 나의 가장 완벽한 여행지인 '오늘'로 돌아온다.

#오늘의생각 #여행가이드 #독백 #현재를살기 #인생이라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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